-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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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오나르도 다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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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술가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종종 그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편인데,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는 누구나가 익히 아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일 것이다.
내가 어릴 때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 밖에 알지 못했다.
그가 그린 "모나리자"는 너무나도 유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의 천재성에 대해 논한다.
그러나 나는 미켈란젤로를 알게 된 이후로,
그가 다빈치보다 더 "위대하다(Great)"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주관일 수 있으므로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기 바란다.
* 미켈란젤로는 다빈치가 갖는 재능과 작품성을 포괄한다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동등한 혹은 그 이상의 천재성을 가진 동시에, 다빈치가 갖지 못한 직관력과 창조력, 다른 분야에 대한 이해력까지 지니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루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토 시모니는 읍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맡겨졌다. 아버지는 영민한 아들에게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울 '공부'를 하기를 원했지만,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만을 했다. 집안에서 예술가가 태어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 아버지와 삼촌들은 매를 때려가면서 아들을 훈육했지만,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미켈란젤로의 외통수 고집을 꺾지를 못했다. 미켈란젤로는 13세 때 당시 피렌체의 뛰어난 화가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서 도제수업을 받는다. 천재는 일찍 발견되었다. 스승도 그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 일 년 정도 스승 밑에서 배우다가 그림에 싫증을 내고, 좀 더 '영웅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 조각을 원해, 피렌체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가 산 마르코 성당 정원에서 가르치던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들의 후원으로도 유명한 메디치 가의 로렌초 공은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보았고, 그의 배려로 피렌체의 뛰어난 학자와 미술 수집품을 보고 읽어내면서 성장했다.
모니카 지라르디는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조각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조각 이전에 행해지는 형태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직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에 숨겨져 있는 형태를 미리 예견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다."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로 대리석을 조각하여 '물질 안에 속박되어 있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빈치의 작품과 비슷한 류를 만들지 않은 이유는 개인의 삶이 갖는 시간적 한계 및 가치관의 차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 미켈란젤로는 천재성을 넘어 위대하다
미켈란젤로에게 환경적 여건은 그다지 풍족하거나 행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현실로 인해 비탄에 잠겨 아무것도 하지 않기 보다는, 많은 작품을 제대로 완성하지도 못한 다빈치에 비해, 자신의 분야(조각)도 아닌 다른 분야(벽화)의 작품까지도 완성해내고야 말았으며, 그렇게 완성된 작품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교황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했다. 그 중에서도 율리우스2세와의 관계는 미묘했다. 두 사람은 마치 형제처럼 다정했다가 불화가 반복되는 그런 관계였다. 천재에게 운명처럼 따라다니는 질투하는 예술가들의 이간질로 교황과 사이가 틀어져 바티칸 궁을 떠났다가 되돌아오곤 한다. 율리우스 2세는 청동의 주조법을 모른다는 미켈란젤로에게 청동 동상을 주문하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 라는 심경으로 청동 주조법을 배워 동상을 제작하다 실패를 하기도 한다. 어느 날, 율리우스 2세는 당시 벽화의 기법을 전혀 모르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둥근 천장에 그림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아니 명령한다. 미켈란젤로의 평전을 쓴 로맹 롤랑은 이 천재를 질투하던 브라만테가 교황의 총애를 받는 미켈란젤로를 곤경에 빠뜨리려고 교황에게 미켈란젤로를 추천한 것으로 본다.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그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고, 이 작업으로 위대한 그의 명예가 실추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군다나 같은 해에 역시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가 바티칸 궁전의 벽화를 그려서 대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이 주문은 미켈란젤로에게는 일종의 시험이자 시련이었다.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를 추천하면서 자신은 빠져 나오려고 했다. 미켈란젤로만큼 외고집이었던 교황은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아, 1508년 5월 10일 이 역사적인 작업은 시작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시기가 천재의 90년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고 '숭고한 세월'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시절에 미켈란젤로는 이런 편지를 쓴다.
"나는 완전히 의기소침해 있습니다. 벌써 일 년이나 교황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너무나 진척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리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일이 늦어지는 것은 이 일이 어렵고 내 본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간만 자꾸 헛되이 지나갑니다. 신이여. 도와주소서!"
그림이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그에게 가정적인 문제도 어려웠다. 자꾸 돈을 요구하는 아버지와 동생들과의 문제에서부터 경제적인 결핍, 건강 문제 등 이 시기에 미켈란젤로는 정말로 죽어버리고 싶은 절망감에 시달렸다. 하지만 예술가의 고통은 바로 감상자의 희열이 된다는 진리를 증명이라고 하듯,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천장화는 1512년 11월 1일 사람들에게 공개되었다."
나는 시스티나 천장화를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이미지만 봐도 그의 위대함을 느끼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 미켈란젤로는 예술에 대한 순수한 집념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불가지론자이지만,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 신의 솜씨라 일컬어졌던 그의 작품들을 보면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또한 미켈란젤로는 숨진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상을 평생 동안 만들었다고 한다. 평생 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교황으로 인해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회의를 가질 법도 한데, 그가 남긴 작품들을 보면 상당수가 "신"에 대한 부분이 묘사되어 있다. 어찌 보면, 그가 생각하는 신의 개념은 동시대의 사람들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혼은 신에게, 육체는 대지로 보내고 그리운 피렌체로 죽어서나마 돌아가고 싶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미켈란젤로의 폭풍우와 같은 인생은 고요한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1534년 9월 도망치듯이 피렌체를 떠난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마에 머물렀고 고향이 아닌 로마에서 죽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 그리운 피렌체의 환영을 다시 보았다. 롤맹 롤랑은 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쓴다. "그것은 2월의 어느 금요일 오후 5시경이었다. 날이 저물었다….'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과 평화의 왕국의 첫날이…' 마침내 그는 휴식을 얻었다. 오랜 소원을 이루어 드디어 시간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상이 미켈란젤로의 성스러운 고뇌의 생애이다. - 이제 시간이 흐르지 않는 영혼은 얼마나 행복한 것이냐."
미켈란젤로가 마지막으로 제작한 조각은 '론다니니 피에타'이다. 1547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중단과 다시 시작하기를 반복하다 결국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 조각을 보면 예수의 모습이 성모의 신체 안에 갇혀 있어 마치 한 인물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전에도 미완성으로 남긴 조각들이 여럿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미완성은 미완성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덜 깎아낸 돌에서 몸부림치는 <포로>와 작은 조각들은 인간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작품인 '론다니니 피에타' 는 성모와 예수을 통하여 신과 인간,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이 함께 있는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진다. 미켈란젤로의 90년 세월은 고통과 슬픔 그리고 절망의 세월이었지만, 그의 작품으로 우리는 환희와 희망과 사랑을 보고 감동하고 앞으로 살아갈 삶의 의지를 마음속에 품게 된다."
내가 이들을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감히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이러하다.
다빈치는 “스승을 능가하지 못하는 제자는 무능하다”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사실주의에 입각해 대상을 IMFGLC 커뮤니케이션하게 표현하는 수준에 불과하며(사실주의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없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탁월함을 과시하기에 급급하다. 특히 스승에 대한 그의 발언은, 그가 예술의 참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그대로 반증하고 있다고 본다.
미켈란젤로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모니카 지라르디는 이렇게 미켈란젤로의 조각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미켈란젤로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제공하는 동시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조각 이전에 행해지는 형태에 관한 연구였다. 그는 직관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대리석에 숨겨져 있는 형태를 미리 예견하고 그로부터 영감을 이끌어냈다."
미켈란젤로는 망치와 끌로 대리석을 조각하여 '물질 안에 속박되어 있는 개념'을 보여주었다. 미켈란젤로는 조각 작업을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자연에서 얻어온 대리석 덩어리를 응시하고 있는 미켈란젤로. 그는 돌 안에 가두어져 있는 위대한 형태를 보고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작품 주위를 둘러쌓고 있는 돌을 조금씩 뜯어내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간 속에서 시간을 예측하며,
시간 속에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
그러한 가운데 자기 자신의 방식이 존재하게 하며,
그 끝에는 자연과 세계가 위치한다.
어떠한 자만심이나 거추장스러움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 자체로 위대하다.
이것은 단순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 함부로 흉내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보여진다.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삶을 보면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든다.
"진정한 예술가는 단순히 그의 작품을 넘어서, 그의 인생을 통해서 완성된다."
몇몇 기록을 보면 그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이나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것들은 어느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을법한 것들이며,
그러한 것들이야말로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특히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금전적 요소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비하하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오히려 그 반대다.
20살 이상 많은데다 최고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다빈치조차도 그의 재능을 시기했으며,
동시대의 교황조차도 그 앞에선 쩔쩔맸다고 한다.
그런 실력에 비해서는 오히려 검소했던 편 아닌가?
금전적 요소에 대한 솔직함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여지며,
그것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강한 애착, 그리고 정당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이 글의 주제는 미켈란젤로가 뛰어나다고 해서 다빈치가 뛰어나지 않다는 뜻을 전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혀둔다.
미켈란젤로의 삶은 어찌보면 비참하기까지 하지만,
Great한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단순히 천재성이나 재능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다른 예술가들과 비교되거나
그의 진면목이 폄하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현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워렌 버핏 그 이상의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