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인지할 수 있는 신념이 구성되어 있음을 뜻한다.
우리의 현실은 실상 모두 각자 다르게 느끼고 경험한다.
똑같은 현실에서도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느냐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다르게 경험되어진다.
초등학생과 할아버지가 사회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민노당을 지지하는 아저씨와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아저씨가 FTA를 보고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다른 것처럼...
같은 이론을 추구하면서도 서로 옳다그르다 대립하고 다투게 되는 것도,
자신이 믿고 받아들이는 신념이 서로의 현실을 다르게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르게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믿고 받아들이는 신념에 의해서 현실을 경험한다.
거꾸로 보자면, 우리는 그 현실 속에서 살게된다.
그리고 우리의 신념을 통해 현실을 재 구성하게 되고, 그 신념의 패턴대로 현실을 살아나가게 된다.
다시말해, 우리가 믿는대로 현실을 창조해 나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하고 지식을 많이 쌓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을 내가 진리로 여기고, 정말 세상에 이것만큼 100% 옳은것이 없을 정도로 이것이 최고다! 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 신념이 만들어내는 현실에 갇히게 된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고 한들 그것에 머무르게 되면 또 다른 제한된 현실 속에 갇혀지는 꼴이 된다.
(그 순간 의식의 진화도 머무르게 된다.)
우리가 새롭게 배운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믿었던 진실과 현실을 깨는 작업으로 충분하다.
매순간 우리가 어느 것에 머무르고, 제한된 현실에 갇혀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새로운 앎은 제한된 현실의 틀을 깨주며 새로운 현실을 만나도록 안내한다.
단지 그 뿐이다.
그것이 전부이고, 진리라고 여기는 순간 우리는 그 현실에 갇히게 된다.
새로운 앎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을 확장시켜 주고 우리의 의식을 확장시켜주면, 그 역할을 다 한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정답으로 간직하기 보다 흘려보내야 한다.
무언가를 새로운 진실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버려라.
우리가 돌이 단단하다는 진실을 굳게 믿고 있으면 돌이 단단하다.
하지만 차력사들의 특별한 진실의 영역으로 들어가 돌을 경험하면 더이상 단단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칼이 날카롭다는 진실을 굳게 믿고 있으면 칼은 날카롭다.
하지만 영매들의 특별한 진실의 영역으로 들어가 칼을 경험하면 더이상 날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목숨만큼 절실하게 믿고 있는가.
혹은 진리라고 여기고 있는지 살펴보자...
당신이 그것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동안 필히 그 현실을 만나게 될것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현실만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잘 이해해야 한다. 여러분이 시크릿과 호오포노포노,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로시스템 등 현실 창조에 관한 공부를 하더라도,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에 걸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곡된 상태에서 받아들인다면,
겉으로는 그런 삶을 추구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것, 자신 안에 신념대로 경험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물론 그 현실이 재미있어서 충분히 경험해도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그것도 또 하나의 제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시크릿, 호오포노포노, 리얼리티 트랜서핑, 제로시스템... 충분히 즐겨도 좋다.
하지만 그것 또한 또 하나의 제한된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자.
진정한 자유는
더이상 그런 것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만나러 가는 여정 그 자체일 것이요..
그리고 그것이 전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