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 범죄자에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있는가.? (2)
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 에 의하면,
사람이 무언가를 지적하고 흉을 본다면, 내면에 그에 반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내 안에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이 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었을때, 내면의 무의식은 남에게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들통날까봐 방어기재로 오히려 남을 더 공격한다고 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압구정을 좋아하는 친구와 압구정을 갔었다. 그 친구는 압구정에 오는 사람들이 여기 사는 사람보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면서, 명품으로 치장 하는 된장녀들을 보고 지적하고 흉을 봤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그 친구는 경기도에 살았고 형편이 넉넉지 못해 명품은 아니더라도 그런 스타일로 옷을 잘 입고 다녔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을 설명하고 혹시 깊은 마음속에선 그런 삶을 원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봤다. 그 친구는 순순히 자신의 모습을 인정했다.
아주 가벼운 예 이지만, 평소의 우리 반응을 스스로 살펴본다면 쉽게 생각하고 넘길만한 부분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 깊은 마음에 현실에 관련된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건을 보고 누구는 몇일 동안 분노를 일으키지만, 누구는 그 순간 안타까워 할 뿐 그 사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경우, 물론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의 경험 등등...이 부분이 바로 복수가 복수로 재탄생될 위험이 있는 부분일 수 있겠다.)
나의 모든 반응은 그것과 관련된 것이 내안에 있기 때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 라는 전통의 속담이 요즘 학자들로 인해 재해석 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깊은 나 스스로를 살펴보자.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했는가..."너 자신을 알라.."
결국 모든 행복과 고통은 내가 만들어 낸다.
구지 내가 나와 관련이 없는일에 분노와 화를 일으켜 어떤 이익이 있는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데 일조를 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조를 하는가.? 오히려 주변에 분노와 화의 파장을 확장하여 마녀사냥이나, 혹은 전체적인 사회에 분노와 화 에너지에 일조를 하여 범죄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가...
예전 미국의 한 도시에서 이런 실험을 했었다.
한장소 같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주기적으로 한 결과
그 도시의 범죄율이 현격하게 떨어졌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벌로써 범죄를 다스리는 것이 그동안 범죄율을 보면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일전에 올렸던 "살인자 범죄자에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있는가.?" 에서 범죄를 용인하고 용서하면 사회적으로 범죄자들이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몇몇 분들이 계시다.
우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선 무작정 범죄를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을 통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의 마음을 다스림으로 인해 사회 평화에 하나의 일원으로써 거듭나자는 취지의 글인 것이다.
가끔 사람들의 자신의 틀에 의해서 현실을 "왜곡 편집 삭제"하여 해석하고 오해를 한다. 분명 이런 분들도 그 들만의 사연이 있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것이리라... 이해하며 그들에게도 두려움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평화의 세상을 함께 하길 기원한다...

심리학의 거장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 에 의하면,
사람이 무언가를 지적하고 흉을 본다면, 내면에 그에 반응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내 안에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이 있는데 그것을 현실에서 만나게 되었을때, 내면의 무의식은 남에게 숨기고 싶은 내 모습이 들통날까봐 방어기재로 오히려 남을 더 공격한다고 한다.
쉽게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압구정을 좋아하는 친구와 압구정을 갔었다. 그 친구는 압구정에 오는 사람들이 여기 사는 사람보다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면서, 명품으로 치장 하는 된장녀들을 보고 지적하고 흉을 봤다. 가만히 관찰해보니 그 친구는 경기도에 살았고 형편이 넉넉지 못해 명품은 아니더라도 그런 스타일로 옷을 잘 입고 다녔다. 그래서 내가 이 부분을 설명하고 혹시 깊은 마음속에선 그런 삶을 원하고 있지 않은지 물어봤다. 그 친구는 순순히 자신의 모습을 인정했다.
아주 가벼운 예 이지만, 평소의 우리 반응을 스스로 살펴본다면 쉽게 생각하고 넘길만한 부분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다시 정리하자면, 우리 깊은 마음에 현실에 관련된 부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사건을 보고 누구는 몇일 동안 분노를 일으키지만, 누구는 그 순간 안타까워 할 뿐 그 사건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경우, 물론 여러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상처나 트라우마의 경험 등등...이 부분이 바로 복수가 복수로 재탄생될 위험이 있는 부분일 수 있겠다.)
나의 모든 반응은 그것과 관련된 것이 내안에 있기 때문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방구 뀐 놈이 성낸다. 라는 전통의 속담이 요즘 학자들로 인해 재해석 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런 반응을 나타내는 깊은 나 스스로를 살펴보자.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이야기 했는가..."너 자신을 알라.."
결국 모든 행복과 고통은 내가 만들어 낸다.
구지 내가 나와 관련이 없는일에 분노와 화를 일으켜 어떤 이익이 있는가.? 사회 정의를 구현하는데 일조를 하는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조를 하는가.? 오히려 주변에 분노와 화의 파장을 확장하여 마녀사냥이나, 혹은 전체적인 사회에 분노와 화 에너지에 일조를 하여 범죄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가...
예전 미국의 한 도시에서 이런 실험을 했었다.
한장소 같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주기적으로 한 결과
그 도시의 범죄율이 현격하게 떨어졌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벌로써 범죄를 다스리는 것이 그동안 범죄율을 보면서 얼마나 효과적이었는가...
일전에 올렸던 "살인자 범죄자에게 함부로 말할 자격이 있는가.?" 에서 범죄를 용인하고 용서하면 사회적으로 범죄자들이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다 라고 이해하는 몇몇 분들이 계시다.
우리는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선 무작정 범죄를 용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것을 통한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나의 마음을 다스림으로 인해 사회 평화에 하나의 일원으로써 거듭나자는 취지의 글인 것이다.
가끔 사람들의 자신의 틀에 의해서 현실을 "왜곡 편집 삭제"하여 해석하고 오해를 한다. 분명 이런 분들도 그 들만의 사연이 있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한것이리라... 이해하며 그들에게도 두려움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난 평화의 세상을 함께 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