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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번째 메시지 "지구프로젝트 - 당신이 지금 지구에 태어난 이유"

by 707 posted Feb 1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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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가설에 따라 살아갑니다. 천국과 지옥가설, 윤회론가설, "그냥 죽으면 끝이다"가설 등등

그 중에서 제가 가장 신빙성 있게 받아들이는 가설을 소개할까 합니다.

 

소개드리는 이유는

무엇을 믿거나 준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현실을 사는 것이 힘든지... 그것은 은하계의 계획에 따라 우리가 가장 힘든 삶을...

지구에서의 삶을 선택했다는 재미있는 가설이 있어서 입니다.

 

물론 제가 이러한 이야기가 맞는 것인지 직접 확인한 바는 없지만,

저의 이성적,논리적 추론에 따라서 가장 신빙성있는 모델이기에 현재 저는 진실이라고 채택한 가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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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순 목사의 특별한 채널링 이야기

 

곽노순 목사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나 물리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귀국해 목원대에서 가르치는 한편, 신구교 공동 번역성서 구약 번역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후기 기독교 신학연구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저서에 "신의 정원" "우주의 파노라마" "밀레니엄 신인간" 등이 있다. 그는 동서양을 넘나드는 철학과 과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넓은 사상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강연과 저술 활동에만 힘쓰고 있다.

 

출처 - 정신세계원

 


 

인구 증가와 환경 오염, 자연 재해로 태양계의 세 번째 푸른 별은 어둠의 혼돈장이 날로 짙어져 가건만

한편에서는 황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낯선 손님들의 목소리’도 차츰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우주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과의 대화’라 할 수 있는 채널링 현상이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하필 지금 이 시대에 나타났으며 인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개구리 울음 소리를 배경으로, 들판 한가운데에 위치한 한적한 곳에서 곽노순 목사를 정점으로 하는 정신세계 소모임이 열렸다. 이날 모임은, ‘채널링’과 그 메시지의 내용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채널링, 차원을 넘어서는 대화


  왜 요즈음 들어 지구촌 주민들은 ‘채널링’이란 말에 귀를 곤두세우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닫혀 있었고, 무엇이 열린 것일까요? 접속된 채널의 건너편에서 보내온 소식들이 속속 책으로 엮어져 나오고 있으니,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원저자가 되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던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채널링이란 말하지 않고도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는 텔레파시와 흡사하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를 나눈다는 점에서는 무당을 연상시킵니다.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까지는 ‘채널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요.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인 존재와의 만남을 ‘현몽’이나 ‘계시’라고 했지, ‘채널링’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3차원의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 통하는 것을 ‘원거리 통신’(텔레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한다면,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과 차원까지도 초월하여 서로 통하는 것을 ‘채널링’이라 할 것입니다. 과거에 통하면 윤회 전생에 밝아질 것이고, 미래에 통하면 ‘예언’이 될 것입니다.


  팩스의 입출력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종이가 가는 것도 아니고 잉크가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쪽에서 보내는 서류 내용을 저쪽에서 한 줄도 틀리지 않게 받아볼 수 있으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별별 기능을 가진 기계가 하도 많아서 현대인은 놀랄 수 있는 기능을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만, 생전 처음 본 듯한 낯설음을 간직하는 것은 삶을 늘 풍요롭게 해주지요.

  팩스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문명은 채널링이라는 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기에 적합한 갖가지 전자제품이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듯이, 외계인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채널링에 들어간 당사자의 의식이 사라지고 없으니, 채널링은 외계인들이나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게 뇌를 송두리째 빌려주는 일입니다. 메시지를 보내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네 뇌로 들어가서 네 사전 좀 빌려 쓰자’고 하는 셈이지요.

  그들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찾아온 것일까요?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시대이며,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무엇일까요?


  사실 그들의 이야기 내용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석가에게서, 노자에게서, 공자에게서, 예수에게서 다 배울 수 있는 것들이고, 그들이 지금 이 시대에 살아 있다면 했을 법한 진리의 말들입니다. 가깝게는 라즈니쉬나 크리슈나무리티가 했던 이야기들에 비교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채널러의 목소리가 달라지는 등 방법상의 새로움이 있고, 표현상의 신선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을 거듭하며 지냈던 과거에 대한 정보나 다가올 ‘빛의 시대’에 대한 정보를, 갖가지 전자제품에 익숙한 오늘 이 시대에 걸맞게, 캡슐 형태의 알약처럼 일목요연하게 전해 준다는 만만치 않은 장점이 있습니다. 라즈니쉬가 세상을 뜬 21세기의 우리에게는 정말 해볼 만한 지적인 도전으로서, 우리 인류에게 주어진 신선한 화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지구는 특수 학교


  태양계가 처음 만들어지고, 지구에 인류가 창조되었을 당시에는, 모든 것이 너무 잘 돌아가서 무료하고 권태로울 지경이었습니다. 모두가 신선으로서 천 살이 넘는 장수를 누렸고, 수명이 끝나도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근심 걱정 없이 편안하게 너무도 잘 지냈습니다. 당시에 신문이 나왔다면, 온통 백지뿐이었을 겁니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보면 기막힐 노릇이 아닐 수 없었지요. 백지나 생산하려고 창조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이를 보고 우주의 여러 신들이 태양계를 만든 신에게 힌트를 주었습니다. “수명을 제한해라!” “고통을 경험하게 하라!”는 등의 조건이 붙은 것은 그 때문이었고, 이 작전은 뜻밖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우주에서 희한한 서커스가 공연될 예정이라고 하니, 여기저기에서 지원자가 쏟아졌습니다. 나는 조명을 담당하겠다, 나는 스턴트맨을 하겠다, 나는 조연출을 맡겠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몸을 써서 위험한 연기를 해보이겠다고 스턴트맨을 자원한 것이 우리 지구인인 셈입니다.


  사람을 지구에 내려보낼 때에는 모두 망각 주사를 맞게 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해서, 본래의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까맣게 잊어먹게 만들었습니다. 수명이 제한되니 아득바득 살려고 애쓰게 되었고, 고통이 있으니 근원을 향해 질문을 퍼붓게 되었지요. 인간을 3차원의 현실에 묶어두는 이런 제한들은 삶에 엄청난 탄력성을 불어넣었고, 창조의 본질인 진화 과정에서 점프하는 현상도 생겨났습니다. 그 모두가 인간을 수명에, 고통에 묶어둔 덕분이었고, 이런 현상은 우주에서 처음 있는 진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구라는 ‘학교’가 대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러니 의심과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육체를 질질 끌고 가며 중력을 힘겨워하는 사람이야말로, ‘지구 학교’의 설립 취지에 걸맞은 인간형이라 할 것입니다. 원래 그렇게 의심과 두려움을 갈고 닦아 보석으로 만들기로 계약서에 사인하고 이 지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교가 대성황을 이룬 것은 좋은데, 너무 대성공을 거두는 바람에 지구 자체가 ‘내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로써 마야의 달력이 가리켜 보이고, 우주적 존재들이 입을 모아 말하듯이, 2012년이 되면 지구는 학교로서의 구실에 종지부를 찍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상황입니다. 이는 창조 자체의 대주기인 26,000년의 끝 부분이자 새로운 주기의 첫부분이며, 2,160년마다 하늘의 창문이 한 번씩 열리는 바로 그 시기이기도 합니다. 외계의 형들이 지구인 동생들을 찾아와 충고를 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지구 자체가 3차원 학교에서 벗어나 4차원을 거쳐 5차원으로 진입하게 됨에 따라, 인간 또한 차원 상승을 앞두고 있다는 것이고, 거기에 걸맞은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중학교 입학을 앞둔 초등학교 졸업생에게는 진학 지도가 집중적으로 필요한 것과 흡사합니다.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데도

누군가가 가르치려 든다면 그 땐 의연히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거울삼아

나를 비추어 보고, 나 자신이 투명해질 때까지

일보일보 나아갈 수 있다면,

훌륭한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일보일보 나아갈 수 있다면,


 

촉매제로서의 채널링 메시지


  60년대에 제인 로버츠라는 주부에게서 그 시초를 찾아볼 수 있는 채널링은, 오늘에 와서는 홍수 사태를 맞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스 스피크스(Seth Speaks)’라는 시리즈로 일대 선풍을 일으킨 제인 로버츠는, 그 뒤를 잇는 숱한 채널러들에게 영적인 밑반찬을 제공한 공을 세웠습니다. 차원 사이의 벽을 뚫고 대화의 통로를 처음으로 연 셈이니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세스의 메시지 중에는 ‘너희는 아직 모르겠지만’이라는 대사가 지겨울 정도로 등장합니다. 3차원의 현실에 갇힌 우리에게는 그렇게도 뛰어넘어야 할 벽이 두터운 것일까요?

  그럼에도 ‘세스’는 선구자로서의 신선함이 더 큰 것이 사실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워낙 많은 채널러들이 등장하고 있어 독자의 분별력이 요구될 정도입니다. 양치기였던 아모스가 시장에 나가서 하늘의 목소리를 외쳤던 것처럼, 전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어느 날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하면 차라리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 근처에도 간 적이 없는 아모스는 하늘에서 받은 소식을 목청 높여 외치다가 할 소리 다하고는 다시 양치기로 돌아갔습니다. 하늘은 그런 사람을 써서 세상에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우주에 이런 상황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상황만이 진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접촉한 것인 양하지만, 알고 보니 이 분야의 책들을 마르고 닳도록 읽었던 전력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통역관 하다가 강사 노릇 하는 것이요, 전자석이 영구자석 흉내내는 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활주로를 자꾸 지나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뜨더라고 아예 드러내놓고 말한다면 괜찮지만, 어느 날 갑자기 펜이 움직여서 저절로 글씨가 씌어졌다거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 시침을 떼면서, 늘상 읽고 들어온 것을 되풀이한다면 거기에는 새롭고 신선한 자극이 있을 리 없고, 독자를 속이는 ‘채널 비즈니스’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연 우리 인류의 성장을 위한 메시지인가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보고 살펴보아야 지구인다운 태도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생에게 5학년 형이 와서는 구구법이나 소수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힌트를 준다면 동생으로서는 그런 형이 고맙고 감사할 것입니다. 하지만 방정식이나 미적분을 가르치려 든다면 어린 동생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형은 저리 가라!”고 외치겠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숙제가 있는데도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이를 대신해 주는 것이 아니라 일깨워 주기만 하고 촉매가 되어줌으로써 “아하!”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도록 해야, 형의 구실을 훌륭하게 해낸 것입니다. 숙제를 대신 해준다면 형 자신의 지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우주 법칙에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손을 맞비벼 불을 일으키는 원시인에게 원자력이 어쩌구 하면서 떠든다면 어찌 될까요? 원시인에게는 성냥이라는 게 있다, 라이터라는 것도 있다는 식으로 한 걸음쯤만 앞서 이야기해 준다면 자극이 되고 격려가 될 것입니다.

 

혼자 가라! 열어둔 채로...

 

  진 리를 깨친 석가는 며칠 동안이나 입을 다문 채 크나큰 희열에 잠겨 있었습니다. 입만 뻥긋 해도 진리에서 천 리나 멀어진다는 것을 번연히 알고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번거롭게 입을 여는 수고를 감당하려 했겠습니까? 이를 하늘에서 지켜보던 신들이 다가와서, “당신 같은 이가 중생을 구제하지 않으면 우주의 낭비”라고 하자, 그는 대꾸했습니다.

 

"알만한 놈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오."

  그도 그럴 법하지 않습니까? 말이 막혀 버린 신들은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고는 이렇게 권유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소. 하지만 조금만 자극하면 크게 깨우칠 이들도 있지 않겠소? 제발 그들만은 모르는 척하지 말아 주구려.”

  이 렇게 하여 석가가 입을 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데도 누군가가 가르치려 든다면 그땐 의연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을 거울 삼아 나를 비추어 보고, 나 자신이 투명해질 때까지 일보일보 나아갈 수 있다면, 훌륭한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여섯 살짜리 소녀가 고사리 손을 모으고 뭐라고 중얼중얼하고 있자 엄마가 물었습니다.

"얘, 너 뭐하니?"

"응,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있어. 인형을 좀 고쳐 달라고, 팔이 부러졌거든." 

  한참 후, 소녀는 다시 고장난 인형을 만지작대며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다시 물었지요

"하나님이 뭐라든?"

"응, 안 고쳐준대." 

준대.”

  이런 순박함이 진짜가 아닐까요? 모든 것을 일일이 창조주의 손을 빌어 해결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굳이 창조라는 걸 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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